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할힌골 전투 (문단 편집) == 개요 == [youtube(GGwUlET2tbw)] >"노몬한은 일본인의 비근대적인 전쟁관, 세계관이 소비에트라는 새로운 전쟁, 세계관에 철저히 격파, 유린당한 체험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할힌골 전투는 [[1939년]] [[5월 11일]]부터 동년 [[9월 16일]]까지 [[몽골 인민 공화국]] 영토에서 발생한 [[소련군]], [[몽골군]]과 [[일본군]], [[만주군]] 사이의 무력 충돌이다. 본 문서에서는 [[1939년]] [[5월]]에서 [[9월]]까지 벌어졌던 '할힌골 전투'뿐만 아니라, 소련-일본 제국 국경분쟁의 일부였던 건차자도 사건 및 [[하산 호 전투]](=장고봉 전투)를 모두 묶어 다룬다. 일본 측에서는 "노몬한 사건"이라는 명칭으로 부르지만 사실상 [[소련]]과 [[일본 제국]]의 제한전에 가깝다. [[봉소전쟁]] 당시 [[중국군]]을 격파한 소련군의 두번째 승전이기도 하다. [[중국 국민당]]의 [[국민혁명군]][* 국민혁명군 중에서 [[장제스]] 직속 중앙군은 당시 [[나치 독일]]과의 교류 덕에 장비 자체는 세계적인 수준이었다. 하지만 숙련된 간부가 부족했으며, 유형적 자산으로만 따져도 일본군 상비사단에 비해 화력, 기동력 등이 크게 떨어져 1개 사단을 상대하는데 최소 3개, 넉넉히 잡아 5개 사단이 필요하다고 자체 판단을 했을 정도였다.]이나 중국 대륙에 있는 [[군벌]]의 군대처럼 완전히 현대화된 군대라고 볼 수 없었던 구식 군대만을 상대하다가 갑자기 수준급의 열강의 군대를 상대하면서 일본군의 문제점이 부각된 전투였다. 예를 들어 일본군은 [[치하 전차]]를 비롯한 주력전차들은 보병 서포트로 만들어졌기에 대전차에 약했고 설상가상으로 보병들은 대전차 장비도 없었고 대전차포도 화력이 빈약했다. 이에 전차를 폭파시키기 위해 일반 보병이 총에 맞으면 전차 밑에 엎드려 수류탄으로 폭파시키라는 명령을 주로 내렸으며 이런 문제는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에도 개선되지 않아 [[미군]], [[영국군]]을 상대로 한 [[카미카제]] 전술로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러일전쟁]] 때 이겼다고 자만하던 일본군은 '[[러시아 제국]]이나 소련이나 거기서 거기겠지.' 라고 생각하여 신병으로 이뤄진 부대만을 전투에 투입했고 정예사단은 거의 투입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어느 나라와도 전쟁을 치르지 않던 소련과 달리 일본은 [[중화민국]]과 [[중일전쟁]]을 하며 [[전면전]]을 한참 벌이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